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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제목

공동체운동 취재의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2.10.30
첨부파일0
조회수
1421
내용
No: 719 글쓴이: 박경일 시간: 2001-05-24(목) 08:52:59 조회: 18

공동체운동 취재의뢰

한국동서비교문학학회
-------------------------------------------
(우:403-714) 경기도 안양시 안양 5동 708-113
안양대학교 영문과 이윤섭 교수 연구실
전화:011-721-6413, 031-467-0810
e-mail:
http://myhome.naver.com/choihiesup


제목 : 한국동서비교문학학회 봄학술행사 및 "동-서 학문공동체 제안"
취재 의뢰

수신: 각 일간지

내용: 아래와 같은 내용을 취재하여주실 것을 의뢰하오니 선처하여주시기
바랍니다.

- 아 래 -

한국동서비교문학학회는 2001년 5월 26일(토) 경희대학교 본관 4층 대세미나실에서 봄 학술대회를 개최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별지의 프로그램 참조)

우리 학회는 이날 우리나라의 서양학 연구자들과 동양학 연구자들이 광범한 상호 협조적 학문공동체 환경을 조성할 것을 촉구하고, 이와 관련된 범 국가적인 협력을 호소하는 "상생적 동-서 학문공동체 제안"문을 발표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별지의 제안문 참조)

(끝)


2001년 5월 22일
한국동서비교문학학회
회장 박 경 일




문의처: 583-4495 박경일
(경희대학교 영어학부 교수)

한국동서비교문학학회
-------------------------------------------
(우:403-714) 경기도 안양시 안양 5동 708-113
안양대학교 영문과 이윤섭 교수 연구실
전화:011-721-6413, 031-467-0810
e-mail:
http://myhome.naver.com/choihiesup



상생적 동-서 학문공동체 운동을 제안합니다.
--학계, 교계, 정부, 언론, 출판을 망라하는 민족 창달의 협조환경을 촉구함.


1. 한국 동서비교문학 학회의 2001년 봄 학술발표회 및 상생적 동-서 학문공동체 운동에 초대합니다. 금년 7월로 창립 5주년을 맞는 우리 학회는 동양과 서양 간의 이해와 대화를 촉진시키고자 창립되어, 그간 매년 봄, 가을 두 차례의 학술발표회와 년1회 논문집을 간행해왔으며, 그 동안 영문학자 중심이었던 이 모임을 불문학, 독문학, 서반아문학, 로문학 등 세계문학 전반으로 확장하고, 문학 중심 연구로부터 문학, 철학, 종교, 문화를 망라하는 광범한 분야의 학제간 협력활동으로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2. 영국 시인 루디야드 키플링은 {동과 서의 발라드}에서, "오 동양은 동양, 서양은 서양/ 이 두 세계는 결코 만나지 않을 것/땅과 하늘이 하나님의 위대한 심판대에/언젠가 마주서 기까지는;/그러나 동도 서도 없고/경계도, 혈통도, 태생도 없다/비록 땅 양 끝으로부터 왔다고 하지만/두 강자가 서로 얼굴을 마주대고 설 때에는."이라고 쓴 바 있읍니다. 이 동과 서는 서로의 경계와 종족과 태생의 벽을 허물어뜨리고 함께 만나야 합니다.

1. 오묘하고 탁월한 우리의 유산/자산을 발전시킵시다.

3.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시인-비평가로 평가되는 T.S. 엘리엇은 "인도 철학의 오묘함이 대부분의 가장 위대한 유럽 철학자들을 학동(學童)들처럼 보이게 만든다"고 말한 바 있으며, "가장 전성기의 중국 문명은 유럽을 조악하게 보이게 만드는 우아함과 탁월함을 가지고 있다"고 쓰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은 철학과 문학, 문화 모두에서 이 오묘하고 탁월한 유산을 잘 유지-발전시키지를 못해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4. 가장 배타적으로 기독교적이고, 유럽주의적이고, 절대주의적인 것으로 비판받는 엘리엇은 그러나 가장 타협적이고 절충적이고 통합적이고 상대주의적이며, 종파와 지역을 초월하는 보편적 사유의 소유자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의 미덕은 섬나라적인 편협성에 대한 비판과 캐톨릭적인 열림에 대한 열정입니다. 엘리엇의 그같은 사상의 바탕은 서구적 철학에 대한 이해와 비판, 그리고 동양적 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엘리엇은 불교 쪽으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버린 사람이었습니다.

5. 가장 반동적인 유럽주의자로 평가되기도 하는 엘리엇의 가혹한 서양 비판은 그만큼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읍니다. 그는 유럽을 그만큼 가혹하게 비판할 수 있을 만큼 동-서 철학과 문화에 다같이 정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정통한 엘리엇 학자 C.M. 컨즈에 의하면, 엘리엇의 장편시 {네 4중주}는 영어로 쓰여진 가장 탁월한 불교적 공(空)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6. 서구인들의 사상과 문학에 나타나는 동양적 국면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국내의 서구 연구자들과 동양 전문가들의 상호협력이 필요합니다. 20세기 최고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표현에 의하면 당시 "세계최고"였던 하버드 대학 철학과의 분위기는 "아리스토텔레스 뒤에 공자(孔子), 그리스도 뒤에 불타(佛陀)"를 놓는 동-서 화합과 상생의 비전을 가르치는 것이었던 듯합니다. 하버드 철학과의 또 하나의 특징은 학문 공동체 정신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바로 이 학풍이 필요한 듯 싶습니다.

2. 왜 학문 공동체인가?
(1) 조시아 로이스의 경우: "세계는...해석의 공동체"

7. 캘리포니아 대학 로스엔절러스 캠퍼스의 로이스 홀 입구 위에는 "세계는 발전적으로 실현된 해석의 공동체이다"(The World Is a Progressively Realizied Community of Interpretation.)라는 구절이 적혀 있읍니다. 이 구절은 일체 현상들이 공동체적 대화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발전-지속할 수 있다는 로이스의 우주론(또는 우주적 사회학)을 집약하고 있으며, 이같은 생각은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사모하는 학문적 선배 찰즈 샌더즈 퍼스의 과학자 공동체 사상의 실천적 강령화입니다. 그 세계는 인간적, 비인간적인 삶의 수많은 실마리들이 상호짜기(interweaving)를 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그것은 상생의 대화주의, 공존의 생태학입니다.

8. 하버드 철학과의 대부(代父) 조시아 로이스는 그의 세미나들에서 정규적인 대학원생들 외에, 화학자, 생리학자, 통계학자, 병리학자, 수학자, 미술 전문가, 이집트 고고학 전문가, 영문학과 교수 등 광범하게 다른 훈련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초빙하여 서로 대화하게 하고 이를 중재하고, 서로 간에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에 관해서는 "이들 모두를 이해하는" 그가 이들을 서로에게 해석하여주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읍니다. 로이스는 질문을 하고 전망을 제시하는 대화의 유지자였읍니다. 당시 세계에서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학자들의 공동체였던 것 같습니다.

9. 로이스 세미나에서는 어떠한 주제에 의해서도 한계가 제한되지 않았으며, 로이스의 다재다능하고 변덕스런 정신은 수학으로부터 인식론에 이르기 까지, 생물학으로부터 윤리학에 이르기 까지 광범한 주제가 다루어졌읍니다. 로이스에 의하면, 인간의 지식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며, 설사 그같은 통일체의 정확한 형태가 결정(結晶)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 점은 변함이 없었읍니다. 인간과 관련된 모든 기술들(arts)은 하나의 공동의 유대를 갖습니다.

10. 로이스 세미나는 "과학의 진정한 교류장"(a veritable clearinghouse of science)이었습 니다. 로이스는 공동적인 과학적 관심사들을 논의하기 위한 해석의 공동체를 실험하고 있었던 것이며, 로이스는 그같은 공동체가 새로운 통찰을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실험실 이라고 확신했었읍니다. 그것은 자연 자체의 통계적 작용들에서 발견되는 "집적의 비옥성" (fecundity of aggregation)을 모색하고자 하는 "사회적/사교적 집적의 새로운 과정들"(new processes of social aggregation)의 실험이었읍니다. 로이스는 일종의 과정 철학자였읍니다.

11. 1907-08년부터 1911-12년까지 간헐적으로 로이스 세미나에 참석했던, 제이컵 로웬버그 는 {하버드 동창회보} 1949년 1월 29일자에 다음과 같이 썼읍니다: "로이스가 에머슨 홀(C 실)의 테이블 머리에 앉아, 앞에다가 커다란 노우트를 펼쳐놓고, 거기다가 방문자의 담화, 그리고 질문들에 대한 그의 답변들을 세심하게 기록하던 것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비평적인 정신들을 지켜본다는 것, 그리고 다양한 생각들의 자유로운 교환에 참여한다는 것은 전율하는 체험이었다. 그 교환은 정말 "풍성하고 생산적인"(flourishing) 것이었다. 왜냐하면 로이스는 많은 학자들로부터 값진 자료들을 받아 해석하고 종합하였으며, 학자 들은 그들 대로 철학의 중요성과 관련성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 중 몇몇은 해마다 그 세미나에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학생들의 경우, 의심받지 않는 지식의 세계들 에까지 침투된 조망들이 그들의 독단을 눅혀주고 그들의 이해를 심화시켰다"(Harry T. Costello, Josiah Royce's Seminar, 1913-1914: as Recorded in the notebooks of Harry T. Costello, ed. Grover Smith, p. 3에서 인용).

12. 베단타의 학파들에 대한 연구를 한 바 있는 로이스는 이같은 연구로부터 신비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이 서로가 서로를 요구하는 변증법적 반려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인정했으며, 이같은 통찰로부터 동-서의 만남을 위한 다수의 시사들이 나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로이스 는 정신의 캐톨릭성의 소유자였읍니다. 우리의 학문은 로이스의 열린 정신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로이스에 관한 언급들은 위의 Harry T. Costello의 노우트를 참조함.)

(2) T.S. 엘리엇의 연구의 경우: 세계는 "공동의 요소들과 노력들의 결과"

13. 모든 예술가(artist)들은 무의식적인 공동의 유대를 가지며, 호머 이래의 유럽 문학은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 하나의 동시적 질서를 이룬다고 말할 때, 1913-14년 동안 로이스 세미나를 수강했던 엘리엇은 인간과 관련된 모든 기술들(arts)은 하나의 공동의 유대를 가지며, 인간의 지식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다는 로이스의 철학을 계승/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로이스가 퍼스의 과학자 공동체 정신을 구현하는 실천자였다면, 철학자 출신의 모더니스트 시인-극작가-비평가 엘리엇의 일생은 로이스의 학문공동체 사상의 또다른 실천인 것으로 보입니다. 엘리엇과 관련된 연구들은 왜 학문 공동체가 절실히 필요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줄 것입니다. 엘리엇은 일찍이 하버드 철학과 시절 이미 세계가 끊임없이 생성변화하는 과정이라는 인식을 보여줍니다. 엘리엇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로카다투(lokadhatu)는 우리의 공동의 요소들(dhatus)과 노력들(efforts)의 결과"입니다.

14. 엘리엇은 하버드에서 영문학 학사, 석사 과정을 마쳤으며, 이후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에서 1년 동안 당시 전 세계의 지성인들을 매료중이던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강의를 수강한 뒤, 1911-14년 하버드 대학원 철학과에서 공부하고, 1916년 영국의 현대 관념론 철학자 F.H. 브래들리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 조시아 로이스로부터 "전문가의 작품"으로 격찬받았읍니다.

15. 엘리엇은 하버드 철학과 시절 인도철학, 불교, 인도 언어학(philology), 원시 불교 경전들을 기록하는 데 사용되었던 산스크리트어 및 팔리어 등 교과과정의 1/3을 동양학 연구에 할애하였읍니다. 엘리엇은 이 기간 중 하버드를 방문한 신실재론자 버트런드 러셀로부터 한 학기 강의를 들었으며, 일본인 방문 불교학자 마사하루 아네사끼 (姉奇正浩)로부터 동양불교 및 나가르주나(龍樹) 강의를 들었읍니다. 또 1년 코스였던 로이스의 과학적 방법론 세미나에서 매 세션마다 미국 실용주의 철학과 기호학의 창시자인 퍼스에 관한 언급을 들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대충 이런 것이 엘리엇의 지적 성장기의 배경입니다.

16. 대체로 1970년대, 그리고 80년대 초까지의 20세기 영미문학계의 일반적인 상황은 문학을 언어의 구조물로 전제, 언어 외적인(extrinsic)인 연구가 금기시되고, 문학 연구로부터 철학, 정치, 사회, 경제 등의 요소들을 배제하는 뉴크리티시즘의 강령이 유지되었읍니다. 특히 엘리엇 연구의 경우, 원숙한 시인 일수록 체험을 하는 개인과 시를 쓰는 개인은 그만큼 완전하게 분리된다고 주장한 엘리엇 자신의 선언 때문에, 그의 철학적 체험과 그의 시는 엄격하게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오랜 동안 대세를 이루었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엇은 그의 문학 생애를 집약하는 시 {황무지}가 "개인적인 투덜거림"이었다고 털어놓은 바 있어 그의 언급들은 보다 신중하게 읽혀질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읍니다.

17. 한때 "철학이 바로 그"였던 엘리엇의 지적 배경을 배제한 엘리엇 읽기는 철학이 "숨은 시학"이었던 엘리엇 문학을 충분히 읽어낼 수 없읍니다. 예컨대, 승려 출신의 시인, 의사 출신의 소설가, 보험판매자 출신의 극작가가 그들의 작품 세계에서 어떤 형태로든 그들의 과거 체험의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입니다. 앵글로- 캐돌릭인 엘리엇의 시들에서 기독교의 흔적을 찾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황무지}를 쓰기 직전 한때 거의 불교도가 될뻔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는 엘리엇의 시들에서 불교의 흔적을 찾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더욱이 엘리엇의 비평이론은 그의 철학의 문학적 표현이라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졸저 {니르바나의 시학: "회전하는 세계의 정지점" 탐구} 참조). 뉴크리티시즘적 엘리엇 찬양, 포스트모던적 엘리엇 때리기는 다같이 엘리엇의 철학적 배경을 배제하고 엘리엇의 문학을 읽음으로써, 제한되고 모순되는 해석들과 비평들을 생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18. 더욱이 작금의 국내외의 문학 논의에 있어 가장 두드러진 현상들 중의 하나는 문학 비평/이론이 문학의 논의에 문화 전반에 관한 논의를 끌어들여 문학과 문화 논의가 뗄 수 없는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는 점입니다. 이때 문화는 물론 철학과 역사와 정치, 경제, 사회, 대중매체 등 광범한 분야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같은 현상의 당연한 귀결의 하나는 문학의 쓰기/읽기와 연구가 이제 역으로 문화에 대한 고려가 없이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겠읍니다. 오늘의 시대가 현상학, 구조주의, 해석학/기호학, 해체론, 탈구조주의, 여성주의, 정신분석학, 대화주의, 신역사주의, 신실용주의 등 새로운 비평 이론과 문화 현상들이 홍수처럼 범람, 앞 시대와 큰 (때로 급진적인 인식론적) 단절을 보이는 문화/문학 환경 속에서 더 이상 전통적인 문학 읽기와 연구 방법론만으로는 충분치 않게 되었읍니다.

19. 인문학이 본래적으로 안고 있는 자기부정적/자기해체적 모순은 그것이 한편으로는 과학/학문(science)의 상태를 지향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부단한 변화와 유전의 현상 앞에 이 과학화에의 지향성을 양보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겠읍니다. 인문학은 무엇 보다도 인간의 삶, 인간다움에 관한 탐구이고, 문학의 존재 이유 역시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 인간다움의 조건과 환경은 부단히 변화하며, 문학은 이 변전하는 삶의 양태들을 낱낱이 포용해야 합니다. 오늘의 급변하는 문화/문학 환경은 이를 읽어내는 새로운 독법, 새로운 인식적 지도를 필요로 합니다.

20. 폐일언하고, 엘리엇 연구(그의 문학과 철학은 엄격히 구별될 수 없는 하나의 텍스트, 그물망을 구성하고 있읍니다)는 그의 철학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요구합니다. 다시 말해서 엘리엇이 철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직접 공부를 배웠거나 간접으로 접했던 철학자들에 관한 연구와 이해는 모두 엘리엇 연구를 위해 도움이 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베르그송, 브래들리, 러셀, 로이스, 퍼스, 제임스, 아네사끼, 힌두이즘, 불교, 그리고 물론 기독교 등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또 모더니즘의 챔피언인 엘리엇 연구에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해체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의 주요한 관심사가 되어 있는 (소쉬르, 퍼스, 그리고 두 사람을 절충하고 있는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과 실용주의 분야의 전문가들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조나던 컬러에 의하면, 소쉬르는 미국의 언어학자 윌리엄 드와이트 휘트니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휘트니가 언어학을 제 궤도 위에 올려놓았다고 높이 평가한 바 있읍니다. 그리고 엘리엇의 하버드 철학과 시절 교과과정에는 휘트니의 산스그리트(어) 문법 과목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엘리엇은 그 자신 뛰어난 기호/해석학자였던 로이스를 통해 퍼스의 기호학에도 충분히 친숙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엘리엇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퍼스의 상징(symbol)에 관해 언급하고 있읍니다.)

21. 과문이지만, 지금까지 거론되어본 적이 없다시피 한 엘리엇과 화잇헤드 간의 관계와 관련된 흥미 있는 몇가지 사실들이 있읍니다. 화잇헤드는 그의 주저 {과학과 근대세계}의 한 장(章)을 통째로 할애하여 영국의 낭만주의 문학을 다루고 있으며, 엘리엇은 [시와 선전]에서 이를 비판한 바 있읍니다. 또 엘리엇이 1927년 캠브리지 대학에서 "클라크 강연"을 했을 때 화잇헤드가 그 강연 자리에 참석했다고 로널드 슈하드가 증언하고 있읍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그 시점이 화잇헤드가 하버드 대학 철학교수로 자리를 옮겨 가 있던 시기인데 어떻게/왜 그가 이 자리에 참석하였느냐 하는 점입니다. 또 엘리엇은 그의 {기독교와 문화} 제3장(章)에서 화잇헤드의 {과학과 근대세계}의 한 구절을 서구 (epigraph)로 인용한 후 일체의 자연현상은 상호연관되어 있다는 화잇헤드적인 관계론을 연상시키는 관계론적 문화의 생태학을 제안하고 있읍니다. 이밖에 화잇헤드 학자 리몬 맥헨리는 {화잇헤드와 브래들리}에서, 화잇헤드가 브래들리의 관념론적인 내적 관계론과 러셀의 실재론적인 외적 관계론을 종합한 것으로 지적하고 있읍니다. 여기서 화잇헤드가 윌리엄 제임스의 다원주의적 입장을 채택하고 있음 역시 흥미로운 일입니다. 엘리엇은 하버드 철학과 학생회장 시절 발표한 한 논문에서 제임스의 실용주의적 입장을 비판 하면서도 그의 급진적 경험주의를 긍정하는 듯한 2중적인 견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흔히 일원주의자로 잘못 알려지고 있는 엘리엇의 다원주의적 국면은 브래들리적인 일원주의적 관계론보다 화잇헤드와 제임스의 다원주의적 관계론에 가까울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브래들리, 화잇헤드, 엘리엇에게 있어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지적 특질은 캐톨릭적인 열림과 너그러움입니다.

22. 예컨대 이같은 점들은 엘리엇과 화잇헤드 간의 시급한 비교 연구를 초대합니다. 또 러셀, 브래들리, 화잇헤드 등과의 지적 문맥을 공유하고 있는 엘리엇과 비트겐슈타인 간의 관계는 전혀 새로운 앞으로의 관심거리입니다.

23. 엘리엇 학자인 필자는 베르그송에 관한 공부를 제외하고는 위에 언급된 거의 모든 학자들과 엘리엇 간의 비교연구 가능성을 탐색해보았읍니다(졸저 {니르바나의 시학} 참조). 그 엄청난 노고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일천할 할 수밖에 없을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읍니다. 그것이 학문적 공동체 환경의 필요성을 단적으로 지시해주는 가장 절실한 이유입니다. 물론 영문학자로서 나름 대로 이들을 연구하고 이해하여 이 결과를 엘리엇 연구에 피드백한 국내외의 연구물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영문학자의 철학 이해가 철학 전공자의 그것에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 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다양한 영역 간의 학제간 협력만이 보다 더 탁월한 성과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동양학의 지원 하에 한국의 서구 연구는 보다 쉽게 국제적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동양학도 서구 연구자들과의 협력 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3) 한국불교의 경우: "한국불교학, 세계학계서 '왕따'"

24. {법보신문}(2001년 5월 9일자)은 창간 13돌을 맞아 유럽과 북미주에서 발간되는 세계적 권위의 종교학 학술지 8종을 분석한 결과를 "한국 불교학, 세계 학계서 '왕따'"라는 제목으로 보도했읍니다. 이 보도에 의하면, 지역 불교 연구의 경우 티벳 불교가 전체 불교사 연구 논문의 27.2%을 차지하여 가장 많았고, 일본 불교 23.5%, 중국 불교 18.5%, 인도 불교 6.2%였으나 한국 불교 관련 연구 논문은 단 1 편도 없었읍니다. 또 논문을 쓴 학자들의 활동 국가 조사에 있어서는 미국에서 활동 중인 학자가 전체의 49.3%로 단연 압도적으로 많았고, 영국 13.2%, 일본 3.5% 등이었으며, 호주, 이스라엘, 필리핀, 남아프리카공화국, 나이지리아, 아르헨티나 지역의 학자들도 불교학을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한국에서 활동하는 학자의 논문은 단 1 편도 없었읍니다. 한국 불교에 대한 세계 학계의 무관심과 한국 불교학의 "우물 안의 개구리"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조사였읍니다.

25. 이 신문은 한국 불교가 국제적으로 외면당하는 원인으로 "언어장벽-전문성 한계"를 들고 "영문지 발간...논문 질 향상 급선무"를 처방으로 제시했읍니다. 그래서 지난 5월 8일 불교 종립대학인 동국대학교의 개교 95돌 기념 국제학술잔치에 자연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5명이 초청되었다는 소식에 어쩐지 더 공허한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26. {현대불교}(2001년 5월 1일자)는 초파일 특별좌담 기사를 싣고 "사회-문화 제현상 포용 불교학 영역 확대" 제하에 "불교 자체만을 연구대상으로 삼아온 지난 세기의 학문 틀에서 벗어나, 여타 학문이나 사회와 문화의 제 현상을 아우르는 시각으로 불교를 연구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읍니다. 이 신문은 앞으로의 불교학의 화두를 "서로 다른 교리나 사상을 갈등이나 대립 없이 하나로 엮어내는 "회통불교"로 지적했읍니다. 이 신문은 또 "90년대부터 불교는 불교학자들만의 연구 주제가 아닌 다른 학문 전공자들에게도 매력적인 연구 분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고 쓰고, 응용불교학의 "21세기 중요 역할"을 전망했읍니다.

27. 불교학을 공부한 "박사 100명도 일할 곳 없다니...", "학술서 출간 저조는 불교학 위기", "동국대 불교대학 교수임용 무원칙" 등의 불교계 신문들의 기사 제목들은 동양학을 아끼는 모든 이들을 우울하게 하는 소식들이고, {미래사회를 향한 불타의 가르침}(대한불교진흥원, 1995), {21세기 문명과 불교}(동국대출판부, 1996), {불교의 현대적 조명}(민족사, 1989), {미래사회와 불교}(원광대학교, 2000) 등은 불교의 앞날을 제시하는 새 좌표들입니다.

28. 여기서 한국 불교를 세계에 알려온 숭산스님이 40여년 동안 이방인들을 선불교의 세계로 이끈 수행법과 사상을 담은 {온 세상은 한 송이 꽃}(무심 옮김, 현암사刊, 2001)이 "{무문관}, {벽암록} 등 불교의 공안뿐만 아니라 도덕경에 나오는 도교사상, 성경에 나오는 기독교 사상 등을 망라해 숭산 스님의 독특한 방식으로 체화된 일종의 "숭산 공안집"이라는 점은 유의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이 스님의 가르침을 따라 해외에 건립된 선원과 사찰은 약 32개국 130여 곳, 신도 5만여명입니다({현대불교} 2001년 5월 16일자).

29. 2000년 봄학기 경희대 철학과의 {중론} 세미나는 근자의 인문학 위기를 돌파하고, 동양학 연구에 새 활력소를 불어넣을 수 있는, 가히 학문 공동체의 모델이라 할 사건이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불교 철학 전공 교수의 주관으로, 기원 2세기 경의 인도 승려 사상가로 제2의 불타로 일컬어지는 나가르주나의 대표적인 저술 {중론}을 읽는 이 세미나에는 고대 희랍 철학 담당 교수, 양명학 전공 교수, 프랑스 철학 전공 교수, 실용주의 철학 담당 교수 등이 석박사과정 학생들 전원과 함께 참여하여 연구-토론하고, 이 결과를 각자의 그 학기 대학원 강의와 연결시킨다는 취지였던 것 같습니다. 이 세미나를 청강 하였던 두 영문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 세미나는 신선한 충격이었읍니다. 강의 주관 교수는 {중론}의 두, 세 가지의 한역본(漢譯本)들, 일역본(日譯本)들, 산스크리트본, 영역본을 비교-대조 해나가며 세심한 차이들을 점검하고 참석 교수들은 양(洋)의 동서를 넘나드는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지고 난상 토론이 이어지는 방식이었읍니다. 다음 학기 또는 다음 해에는 다른 과목이 새로운 중심 강의로 선정되어 같은 방식으로 진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같은 방식은 동학과 서학, 고대와 현대 및 세부 전공 분야들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생각되었읍니다.

30. 유사한 방식으로, 엘리엇 세미나도 시-비평 학자 외에 브래들리, 러셀, 베르그송, 화잇헤드, 로이스, 퍼스, 기독교, 불교, 힌두이즘, 기호학, 해체론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광범한 학제간 모임이 가능하다면 로이스적 학문 교환소의 재현을 보게 될 것이다.

3. 동양학 관련 모든 분야의 총체적 협력과 성원이 필요합니다.

31. 지난해 출판된 몇 권의 저서들은 동-서 비교문학 연구에 있어서 거두어진 의미있는 결실들 이라고 생각됩니다. 한림대학 인문학연구소 주최로 개최된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중심으로 묶어 출판된 {서양문학에 비친 동양의 사상}(예문서원), 여러 엘리엇 학자들의 동양적인 엘리엇 연구물들을 묶은 {엘리엇과 동양사상}(도서출판 동인), 한 엘리엇 학자의 영문학에 대한 다양한 동양적 연구방법론들을 수록한 {니르바나의 시학: "회전하는 세계의 정지점" 탐구} (도서출판 동인) 등이 그것입니다.

32. 한국 동서비교문학 학회는 앞으로 여건이 허락되는 대로 국내외의 동양철학자들을 초빙하는 학술발표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면서 학문적 대화의 터전을 넗혀나가겠습니다. 가능한 한 다양한 학문적, 사회적 쟁점들을 동양사상과의 비교연구적 시각에서 다루는 학술발표회 및 논문집 편찬, 그리고 단행본 간행 등을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33. 중심적인 연구는 "서양문학과 동양사상"이라는 토픽이 되겠습니다. 그 밖에 동양주의 (오리엔탈리즘)로부터 시작하여 동양(학)과 서양(학) 관련의 다양한 쟁점들, 예컨대 생태-환경, 유전공학, 정체성/주체성,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철학, 기호학, 해석학, 문화다원주의, 페미니즘, 포스트-식민주의, 신실용주의 등과 동양사상과의 비교연구가 주요한 토픽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34. 우리 학회는 국내의 동양철학계 및 동양종교 교계와의 교류도 활성화 해나가려고 합니다. 동양철학 관련 출판계와도 협력하여 해외의 동양학 관련 서적들의 국내 번역 소개 사업을 적극 추진하며, 우리 문화와 학문의 해외 번역 소개에도 관심을 두겠습니다.

35. 우리 학회의 학술발표회 날 동양학 관련 단행본, 잡지, 신문 등의 대대적인 전시회, 할인 판매, 할인 정기구독자 모집 등의 행사를 개최함으로써 동양학 관련 출판, 유통의 새로운 마당을 마련하였으면 합니다. 우리 학회의 회원들은 모두 잠재적인 동양학 관련 독자이고 집필자이고 판촉요원입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을 모은다면 이같은 행사가 감히 우리나라의 유서깊은 "북 패어"(Book Fair)로 성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36. 또, 예컨대, 우리의 정신적 유산이고 문화재이자 관광자원이기도 한 전국 도처의 사찰들의 영문(英文) 안내판들의 조잡한 표현들과 오역(誤譯)들은 단순히 관련 종교계의 문제일 뿐 아니라, 시급히 바로잡아야 할 국가적 사업이라고 생각됩니다. 이탈리아 같은 나라의 경우 관광산업이 국가적 생존의 사업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 정부와 국민, 그리고 학계 모두 명심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문화와 사상, 관광자원을 소개하는 각종 영문 자료들의 상태도 면밀히 점검되어야 합니다. 동서양의 문제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 학회가 이같은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려고 합니다.

37. 학계, 교계, 정부, 언론, 출판계 등 모든 관련 기관들의 성원과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구슬이 서말이라고 꿰어야 보물입니다. 그리고 백지장도 맞들어야 가볍습니다. 관련분야들의 총체적 협력이 민족문화의 창달에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우리에게 스즈끼 다이세츠(鈴木大拙)들이 필요합니다.

38. 금년 3월 한국문학번역원이 문을 열고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주요 활동은 한국문학의 외국어 번역 지원과 한국 문학의 해외 출판 지원인 듯 싶습니다. 이 모든 활동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것이 우리 문학과 국가 발전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왜 "경제" 번역원, "외교" 번역원, "정보기술" 번역원이 아니고, 하필 돈벌이 되지 않는 "문학" 번역원인지도 의심스럽습니다. 혹시 한국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그 궁극적 목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그렇다면 그것은 큰 오산, 착각이라 생각됩니다.

39. 나라의 국력이 한, 두 차례의 노벨상 수상으로 강화되는 것도 아니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하여 한 나라의 문학의 수준이 하루 아침에 국제적 수준으로 격상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펄 벅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미국문학의 예술성이 상승한 것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노벨상의 마력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40. 중요한 것은 기존의 문학 작품들을 영어로 번역하여 세계에 알리고 (외화를 벌어 들인다는 목표는 아닐 것으로 생각됩니다) 궁극적으로 한, 두 작가가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보다, 국민의 기본적인 문학적 감수성을 교육시키고 문학 읽기를 통한 창조적 비평적 사고를 훈련시키고, 보다 충실한 영어교육의 강화를 통해 해외의 우수한 문학들을 정확히 번역해들임으로써 해외의 문학을 제대로 접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문학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41.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아일런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의 한 귀절 "Good morning."(불어로 Bon jour.)을 일본어 번역 "今日わ."(ごんにちわ.)로부터 중역(重譯)하여 "今日"은 "오늘"로, 토씨 "わ"는 "은"으로 옮겨 "오늘은?"이라고 번역하는 넌센스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어떻게 외국문학의 이해와 연구가 제대로 되기를, 우리 문학을 창달할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나라의 국보를 자처하시던 한 선생님께서 "번트 노턴"(Burnt Norton)을 "불타버린 노턴"으로, "결사대"(forlorn hope)를 "외로운 희망"으로 번역하셨던 것은 영문학 1세대에게서 피하기 어렸웠으리라고 이해할 수 있는 고전적인 오역입니다.)

42. 문제의 번역자를 비난하려는 생각이 아닙니다. 그 시절의 싼 원고료, 우리의 척박한 출판 풍토가 그같은 사고/사건을 만든 것입니다. 번역자는 이같은 상황의 희생자일 뿐입니다. 당시 영한 번역 원고료는 200자 원고지 한 매 당 대충 2000원 선이었습니다. 박봉의 교수, 학자들은 생활의 보탬을 위해서 싼 원고료를 감수하면서라도 번역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출판사측이 요구하는 출판일자를 맞추기 위해서는 무리한 번역작업을 강행군하였을 것이고, 때로는 번역작업의 하청계통을 따라 더 값싼 인력, 그리고 최악의 경우 영어문헌의 日-韓 중역 전문 인력에게 번역작업이 분담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 불행한 일은 위에서 보시다 시피 "今日わ."(ごんにちわ.)도 제대로 이해 못하는 사람이 이같은 작업을 하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것입니다.

43.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원고료는 여전히 변동이 없이 제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동안 화폐 개혁이라든가 원화의 절상/절하 등의 사건은 없었습니다.) 이 나라처럼 영어에 관심 많은 나라가 세계 어디에 있겠습니까. 학부모들의 극성에다, 각종 기업체들이 조성하는 사회분위기, 그리고 최근에는 심지어 정부까지 나서서 영어가 나라의 명운을 결판짓는 요술 램프라도 되듯이 야단법석을 떨고 있지 않습니까. 이 나라에서 영어 못한다는 사람 없고 따라서 영-한 번역 원고료는 올라가지 않아도 그 일을 할 인력은 넘쳐납니다. 값싼 번역 인력이 넘쳐나는데 원고료가 오를 리가 없읍니다. 고급 번역 인력은 그 능력의 쓰임새를 찾지 못합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대학에서 번역 연구물은 연구업적 으로 평가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44. 결과는 전반적인 번역 수준의 하락입니다. 더욱이 우리 사회에는 소위 "초벌 번역" 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현상이 버젓이 묵인되고 있읍니다. 법으로 엄격히 다스려야 할 사안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라의 존망과 관계없는 일인가요? "My sun"(나의 태양)을 "나의 아들"(My son)로, "북부인"(北部人: northerner)을 "복부인" (福婦人)으로, "비핵지대" (非核地帶: atom-free zone)를 "핵자유지대"(核自由地帶)로 옮기고, 극단적인 예를 가상해서, "arsenic"(비소: 치명적인 독약)을 "영양소"로 번역했을 경우를 상상해보십시오. 잘못된 번역은 흉기, 공해, 독물과 다를 바 없습니다. 번역의 수준은 한 나라의 문화의 수준이고 이것은 국력의 척도입니다. 도처에서 넘쳐나는 잘못 번역된 정보들은 나라의 장래를 어둡게 하는 어두운 그림자들입니다.

45. 국가적인 지원을 받는 번역기관이라면 무엇보다도 시급히 해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제대로 된 한국의 역사 연구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 등 서구의 국가들(의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져왔고 또 얼마 전 우리 언론에 보도된 사실입니다만, 미국 대학들에서 한국의 역사를 가르칠 영어로 된 텍스트가 없어 일본인 학자에 의해 일본의 관점에서 씌여진 한국사 저서(영역본)를 사용한다는 기가 막힐 소식이 있었읍니다. 나라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일본의 역사 왜곡 교과서 파동에 대한 근원적 대비가 전혀 안되어 있는 것입니다.

46. 한국사학자는 물론 이 땅의 모든 역사학자들은 크게 반성해야할 일이며, 이 땅의 영어/영문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비단 역사학과 영어/영문학 분야의 일만은 아닙니다. 이 나라의 전반적 상황이 이 꼴인 듯 싶습니다. 수년 전 우리 나라에 IMF 사태가 터져 경제 관련 인사들이 온통 나서서 국제금융시장으로부터 돈을 꾸어오려고 법석을 떨었을 때, 한국의 협상대표들이 뉴욕증시의 전문용어를 이해하지 못해 낭패를 당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47. 각 분야별로 전문적인 영어 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하여야 합니다. 장기적인 해외 거주 동포들의 외국어력을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48. 불교 종립학교들, 유교 전통을 계승하는 학교들 등의 동양학 관련 교육기관에서는 외국어 능력이 뛰어난 학생들을 장학금을 주어 유치하여 교수요원으로 양성하고, 이들이 동양학을 공부하여 이를 외국어로 번역하고 또 외국의 동양학 관련 문헌들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을 전담토록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같은 사업에는 국가적인 지원이 필요합니다. BK21 같은 계획은 바로 이같은 사업을 지원하였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집단에 대한 혜택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적, 문화적, 학문적, 그리고 관광/경제적 발전의 초석을 다지는 일입니다.

49. 일본의 세계적 불교학자 스즈끼 다이세츠(鈴木大拙)는 원래 중등학교 영어 교사였던 것이, 어떤 기회에 불교 서적의 영어번역을 하게 되었고 이같은 일들이 잦아지면서 전문적인 불교 지식이 필요하게 되어 불교를 연구하면서 번역을 하게 되어 그같은 위대한 학자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50. 너무도 때늦었지만 이제라도 우리도 스즈끼 같은 학자들을 국가적으로 양성할 것을 제안합니다. 기존의 외국어고교의 교육을 본래의 취지대로 지원-육성하여, 이들이 대학의 외국어 전공으로 진학하도록 제도적으로 유인하고, 학문적 환경을 갗추어주고, 또 이들이 이같은 과정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은 통제하고, 그 다음 단계의 특별 교육과정을 강화한다면 영어 등 외국어 전문가의 양성은 전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5. 동양학 번역의 대원칙의 수립

51. 차제에 동양학 관련 번역--英韓 및 韓英 번역의 경우 모두--의 대원칙을 하나 제안
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동양학이라 함은 물론 철학, 종교, 문학, 문화, 정치, 경제, 사회 등 동양적인 일체를 포함합니다.)

1. 동양학자들과 영문학자들 간의 연구와 논의를 거쳐 광범한 동양학 관련 英韓對譯
용어집을 제정한다.

2. 영한 번역이건, 한영 번역이건, 이 용어들을 활용하여 번역을 한다.

3. 동양학 관련의 모든 문서에는 이 용어집을 첨부한다.

예컨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관광안내 책자에도 이 용어집을 (필요한 만큼씩 축약된 형태로) 첨부해준다면 한국어(용어)를 배우는 즐거움도 함께 줄 수 있을 것입니다.

52. 그럼으로써 동양학 관련 특수 용어들을 설명하려는 노력으로부터 빚어지는 여러 가지 번역상의 문제점들이 일시에 해소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불국사의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 백운교 등을 소상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탑(塔) 및 다리(橋)들과 관련된 여러 전문 용어들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영문이 길어지고 복잡해지고 그럼으로써 그 의미가 애매해지고 왜곡되는 현상을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영문이 길어지고 복잡해지는 만큼 글이 졸렬해질 수 있는 위험도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될 경우 능통한 번역자가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영어 능력에 의해 큰 실수 없이 번역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6. 동-서 학제간 상호 협조환경의 유지

53. 우리 학회는 겨우 네 살 박이입니다. 아직 기반이 닦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형식적이고 면피적인 학술활동이 아니라 동양인으로서의 긍지를 유지하고 동양학과 서양학에 대한 균형있는 발전을 모색하고 우리의 독특한 학문을 창달하는 방향으로 학술활동을 해나가려고 합니다. 동양에 관한 연구는 우리가 서양인들보다 앞설 수 있는 분야로 생각됩니다. 서구인들의 동양학 이해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의 서양학 연구도 동양학의 지원을 받을 때 한층 경쟁력이 강화될 것입니다.

54.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서양학도 아니고 동양학도 아닌 것이 무엇을 할 수 있겠냐 하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모하고, 얄팍한 면이 없지 않겠읍니다만 그러나 누군가는 동양과 서양을 접맥시키는 시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동양 전문가와 서양 전문가가 제각기 자기 분야만을 들여다 보고 있다면 전체적인 그림을 보지 못할 것이며, 그만큼 상호 간의 이해와 대화는 어려워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학문 연구이건 다른 어떤 일이건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와 전체적인 상황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 함께 병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55. 날로 가속화되고 있는 지구촌의 실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우리 학계는 너무나 자신의 영역에만 안주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특히 동양 사상 분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서구적인 학문 분위기에 친숙함으로써 이 나라의 서구-친화적, 또는 서구-추수적 학문-문화 분위기 속에서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을 경우 동양적인 사상과 학문은 서구중심적인 분위기에 몰려 고사하는 상황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는 염려들이 적지 않습니다.

56. 한국 동서비교문학 학회는 학회 회칙에 명시된 대로 동양과 서양의 문학과 사상에 걸친 광범한 연구-봉사활동을 해나가려고 합니다. 예컨대 불교를 페미니즘, 생태환경, 해체철학, 포스트구조주의, 광범한 의미의 포스트모더니즘, 현대기호학, 실용주의 철학 등과 (주로 연기설 중심으로) 광범한 비교연구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해외에서는 이같은 연구들이 적지 않게 발표되고 있으나 국내의 경우 과문이지만 그러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57. 국내의 동양학(자들)과 서구 (문학, 철학, 문화) 연구자들이 광범한 협력적 활동을 할 필요가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만이 동양학을 살리고 동양의 서구학문 연구자들이 보다 효과적으로 서양의 학자들과 경쟁해나갈 수 있는 길이 아니겠나 생각됩니다. 그것이 동양의 전반적 학문이 서구추수주의에 빠지지 않고 서구 학문과 대항해나갈 수 있는 길일 것입니다.

58. 예컨대 한국 영문학자들이 서양의 국제적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것은 경험적으로, 통계적으로 극소수입니다. 언어적 문화적 갭을 극복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일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국내의 계량적인 학문 평가 환경이 양질의 학문 탐구를 장려하기 보다 저질의 논문 양산을 조장하고 있는 현실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영문학 연구의 수준이 결코 국제적 수준에 미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다소간의 안목만 있다면 금새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국내에 구입되고 있는 수많은 영문학 관련 학술지 및 저술들 중에 쓰레기 같은 것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여기서 한국 학자로서 쉽게 해외의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할 수 있는 특정의 분야가 있다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같은 상황을 돌파하는 길은 국내의 동양학자들과 서구 학문 연구자들이 광범하고 활발한 협동적 확문활동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7. 학문 공동체 운동은 인문학 위기 돌파의 대응책

59. 근래에 빈번히 지적되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 역시 바로 이같은 변화하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자업자득이라고 생각됩니다. 서구적인 것에 입맛이 절어 있는 우리에게 고리타분한 불교 이야기, 공자, 노자 이야기가 입맛당길 리가 없읍니다. 도올 김용옥 현상은 이같은 상황에서 동양과 서양을 넘나드는 (저급하지만) 박식과 해학과 개그맨적 쇼기질이 맞아떨어져서 시청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킨 결과가 아니겠나 싶습니다. 그러나 도올 현상 중에는 동양학 및 서양학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이해를 크게 그르칠 수 있는 대목들이 다수 있음에도 정작 해당 불교, 유교 등의 학계와 교계에서는 적절한 대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같은 대응이 겨우 주부로부터({노자를 웃긴 사나이}), 또는 평신도 수준에서({도올에게 보내는 사자후}) 나오고 있는 것도 아이러니컬한 일입니다. 이 지적은 이같은 학계 밖의 반응을 폄하하자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도올에게 보내는 사자후}의 저자가 도올이 노자의 무위자연을 불교의 무위(법)와 동일시한 망발을 지적한 것은 너무나 정확한 지적입니다. 만일 도올이 그같은 망발을 했다면, 그는 노자의 무위(자연)도 불교의 무위(법)도 제대로 모른다는 의미가 됩니다. 과문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불교계에서는 이에 대한 아무런/적절한 반응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우리나라의 불교(학)계를 포함하여 동양사상 관련자들은 일반 국민들에게, 또는 학문적으로, 매력있는 동양사상의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는 듯합니다. 동양사상(학자들)은 국민적인 비전과 이데올로기를 제시해주어야 할 책무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60. 하버드 철학과에서 공부한 나에게 감히 누가 도전하느냐는 식의 자만에 빠져 있는 도올의 경우, 영어 읽기가 매우 불안하고 영어 번역이 기본적인 훈련이 안되어 있다는 점(차후에 기회가 되면 별도로 언급하려고 합니다)으로 미루어, 그의 동양 고전 읽기 및 번역에도 동일한 심각한 문제점들이 내포되어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나는 40여권의 (동양고전)책을 번역했는데 내 번역에 대해 누가 시비하느냐 라든가, 자신의 {금강경 강해}는 "가장 완벽한 판본"을 처음으로 번역했다든가, 30-40 여년 동안 피눈물 흘리며 번역 실력을 쌓았다든가 하는 식의 주장들은 객관적으로 그의 번역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것과는 아무런 필연적 관련성도 없는 졸렬할 궤변일 뿐인데도, 누구도 적절한 지적을 하지 못하고 있읍니다. 그러다 보니 도올 같은 대중적 영웅이 출현하는 것이겠습니다.

61. 도올 현상은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입니다. 하버드에서 공부했다는 사람이 기초가 부실하고 작은 재주를 뽐내며 천방지축 날뛰는 모습은 같은 하버드 출신의 엘리엇적인 표현을 빌면 "갱생하지 않는"(unregenerate) 괴벽장이일 뿐입니다. "갱생하지 않는"이라는 말은 쉽게 말하자면 "구제 불능"이라는 뜻입니다. 졸속주의, 계량주의, 요령주의, 상업주의, 외형주의 등 지난 시절의 우리의 환경이 그같은 결과를 빚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제 이런 것들을 청산해야 할 때입니다.

62. 동학과 서학은 상호의존적인 관계에서 더 크게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학회는 앞으로 이같은 협조적 환경의 구축을 위해 미력을 다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이나라의 인문학과 기초학문의 위기를 돌파하는 하나의 대책일 수도 있습니다.

8. 가마꾸라(鎌倉)를 배워야 합니다.

63. 잘은 모르겠읍니다만, 일본의 경우 오래 전부터 유서 깊은 천태본각사상의 원류지인 가마꾸라(鎌倉)에 유수한 서구의 불교 학자들을 데려다 연구케 함으로써 이들이 일본 불교를 세계 불교의 본산인 듯이 보급하는 전위대가 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 불교와 유교, 우리의 동양사상이 일본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국내에 번역된 몇몇 자료들을 보면, 매우 주제넘는 말씀입니다만, 그들의 학문과 정신적 차원이 전혀 대단치 않다는 생각을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은 英語化를 통해 世界化에 성공하고 있다는 차이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세계 제2의 경제대국 일본의 국가적 사업인지 불교 종단 차원의 사업인지는 문외한으로서 알 수 없지만, 우리가 본받아야 할 타산지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64. 불교의 경우이건, 유교의 경우이건, 우리는 너무 무기력하고 소극적입니다. 돈 들이지 않아도 심산유곡 절간까지 공양미 싸들고 와 잘 먹고 사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배뚜들기며 여유부리실지 모르지만, 그래 가지고는 이 험악한 세태에 민중을 이끌지 못하고 언젠가는 도태되고 말 것이라는 우려가 널리 팽배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일입니다. 예컨대 불교의 경우 달라이라마, 틱낫한, 구산스님 등이 서구에서 민중들의 정신적 구원의 원천으로 날로 존경을 받고 그 세력(?)이 번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는데, 정작 그 본산인 국내에서는 번성은 커녕 날로 위축되어 간다는 우려가 팽배하고 있습니다.

65. 주제넘은 이야기가 길어졌읍니다. 하지만, 예컨대, 지난 십수년 동안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해서 불교, 유교, 노장사상 등 동양사상과의 관련성에 관한 거창한 학술심포지엄 한번 제대로 있었는지, 관련 분야의 제대로 된 연구서 하나 나왔는지 과문이라서 모르겠습니다. 동양사상이 광범한 의미에서의 포스트모던적 현상들과의 비교연구를 요하는 여러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음은 이미 널리 지적된 바 입니다만, 우리의 학문과 문화, 그리고 일반 생활 속에 깊이 침투해 있는 이같은 현상을 우리의 시각으로부터 보려는 노력이 너무 미미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단적인 예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알렉산더 네하마스의 니체 읽기는 불교의 공/연기설에 대한 현대적 주석처럼 읽혀집니다만, 불교(학)계서는 어떻게 읽으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들뢰즈의 니체 읽기 역시 너무나 {중론}과 유사한 분위기를 보여준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이데거의 "동일성과 차이"에 관한 사유가 얼마나 불교의 연기설적 사유와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새로운 관심거리입니다.

66.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해체철학, 페미니즘, 정신분석학, 신실용주의, 생태-환경, 공동체사상, 세계평화 등과 동양사상에 관한 다양한 분야의 연구가 동-서의 광범한 학문 분야에 걸친 학제간 관심사로서 추진된다면 더 효율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67. 동-서의 여러 학문 분야의 협력이 절실하고 절실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지 못할 경우 우리는 언제까지나 나무에 가려 숲을 못보고 말 것입니다. 예컨대, 정신문화연구원 김형효 교수께서 시도하는 구조주의, 해체철학, 하이데거 철학과 동양사상의 접목, 노장사상에 대한 해체적 독법 등은 매우 의미있는 연구방법론 실험이라 생각됩니다.

9. 불교의 연기설과 해체철학

68. 앞으로 우리 학회에서도 "불교적 연기사상과 현대 서구철학에 나타나는 관계론적 사유" 또는 "해체론의 선구들: 노자-불타로부터 데리다, 들뢰즈까지" 등의 주제를 내걸고 가능하면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해보려고 합니다.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 연유되는 정체성 부정 및 상호의존적 사상으로부터 시작하여, 니체, 후설, 소쉬르, 퍼스, 브래들리, 화잇헤드, 러셀, 비트겐슈타인, 바흐친, 데리다, 바르트, 푸코, 라캉, 크리스테바, 들뢰즈 등에게서 나타나는 관계론적 사유와 정체성/주체 해체, 그리고 불교적 공(空)에 관한 심층적인 논의의 마당도 준비하고자 합니다.

69. 플라톤 이래의 실체론적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적 인식론으로의 급진적 패러다임 전환은 매우 연기설적인 세계인식에 근접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동양학 전문가들께서 많은 관심을 갖고 성원하여 주십시오. 이와 관련된 고견들을 우리 학회 홈페이지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70. 그 동안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철학, 페미니즘, 생태-여성, 정신분석, 신실용주의 등과 특히 불교의 비교연구 방법론들, 헤라클리투스, 니체, 후설, 소쉬르,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 데리다, 푸코, 라캉 등과 동양사상과의 비교연구의 가능성들이 다양하게 모색되어 왔습니다. 앞으로의 중요한 연구 분야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도 동양학 전문가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71. 예컨대, 러시아의 대화적 상상력의 이론가 미하일 바흐친은 프랑스의 포스트구조주의자 줄리아 크리스테바에 의해 현대 서구 문학비평이론의 한 주류로 살아났고 그 키워드는 상호텍스트(intertext) 개념이며, 이보다 앞서 프랑스의 문학적 구조주의자 제1세대라 할 츠베탕 토도로프가 바흐친(의 상호텍스트 이론)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이후 상호텍스트 개념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그리고 데리다의 해체철학 등 현대 비평 이론의 핵심적 키워드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궁금하고 흥미있는 것은 작금 전세계의 비평 이론을 주도하고 있는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들의 이론적 활동무대가 {뗄 껠}지이고, 이 학술지에 나가르주나(龍樹)의 중관 사상 등 불교에 관한 중요한 글들이 게재되었으며, 이들이 이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우타 리프만 샤우프에 의하면, 과도한 유물주의에도 과도한 허무주의에도 탐닉하지 않는 푸코의 중도적 자세는 불교의 중도 정신의 실천이며, 푸코의 밑텍스트는 동양사상입니다.


10. 공존재(co-being), 상호존재(interbeing)

72. 그보다 중요한 것은 광범한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에게서 발견되는 사유의 틀이 관계론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단적인 예는 가장 정통한 바흐친 해석자로 알려진 마이클 홀키스트가 바흐친의 핵심적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는 코비잉(co-being, 共存在) 개념과 월남의 망명 불교승려 틱낫한의 인터비잉(interbeing, 상호존재) 개념은 너무나도 불교의 (화엄)연기설적인 세계인식과 유사하며, 근자에 특히 생태-환경의 문제와 관련 논의되고 있는 화잇헤드의 유기체적 관계론과 근사한 듯합니다. {동서철학}(Philosophy East and West)지가 75년 10월호에 "화잇헤드와 불교" 특집을 꾸몄던 것은 이 모든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73. 화잇헤드와 퍼스의 관계는 앞서도 지적되었읍니다만, 일체 현상의 연속성의 개념인 퍼스의 연속주의(synechism)는 불교적인 일체현상의 비개체주의, 무자성/공 인식과 유사하다는 불교학자 플리니 제이컵슨의 지적도 여기서 상기될 필요가 있습니다. 아울러 폴 와이스와 함께 퍼스의 방대한 미발표 유고들을 정리하여 "Collected Papers of Charles Sanders Peirce"를 편찬-출판한 미국 제1의 불교통 찰즈 하츠혼은 화잇헤드의 사상을 기독교 및 불교와 접목시키는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의 최초 주창자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읍니다.

74. 이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흥미롭고 궁금한 것은 유럽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유일하게 높이 평가하는 미국 철학자인 퍼스의 기호학에 나타나는 대화주의적 상상력이라 할 것과 바흐친 및 여러 포스트구조주의자들 간의 유사성입니다. 빈센트 콜라피에트로는 그의 기호학 용어 해설집에서 퍼스(기호학)를 유럽의 탈구조주의 기호학 및 바흐친의 대화주의, 그리고 타자/이타성(alterity)의 문맥에서 되풀이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콜라피에트로 외에도 몇몇 학자들이 지적하다시피, 퍼스에게 있어는 기호는 대화적입니다. 모든 기호는 부단히 새로 해석되고 다시 재해석되면서 그 의미들이 상호 재조정됩니다.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75. 비개체주의/비개성주의, 연속주의(synechism), 전일주의, 대화주의, 상호텍스트주의, 등의 개념들은 해체철학을 위시한 포스트-/모더니즘 전반에 걸친 여러 이론들 및 불교의 연기설과의 긴밀한 비교연구를 요하는 과제로 생각됩니다. 20세기초 서양 철학의 화두는 관계의 문제였으며, 불교의 핵심 교의는 일체 현상의 관계적 일어남을 가르치는 연기설입니다. 새 천년의 화두는 단연 지난 두 밀레니엄의 플라톤적 실체론을 대치하는 관계론적 사유로부터 출발하는 상생적 대화주의와 생태주의가 되지 않겠나 예상됩니다.

이같은 다양한 분야의 효과적인 연구를 위해 국내의 동, 서 학문 연구자들 간의 협력이 절실하다고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2001. 5. 26.
한국동서비교문학학회
회장 박경일

한국동서비교문학학회 2001년 봄 학술발표 대회 (프로그램)

일시: 2001년 5월 26일 (토) 오전 10시 - 오후 5시 30분
장소: 경희대학교 본관 4층 대세미나실

09: 30 - 10: 00 등록
10: 00 - 10: 10 회장 인사 (박경일, 경희대)

오전 사회: 이윤섭(안양대)
10: 10 - 11: 00
발표 최희섭(전주대)
"휘트만의 '나 자신의 노래'의 '자신'의 불교적 고찰"

11: 00 - 11: 10 휴 식

11:10 - 12: 00
발표 한태호(관동대)
"W.S. Merwin 시의 동양적 요소: 내용과 형식의 시적 친화력"

12: 00 - 12: 10 휴 식

12: 10 - 12: 40 오전 발표 토론
좌장: 정갑동(동국대) 토론: 김구슬(협성대), 박주식(카톨릭대학), 김원중(성균관대)

12: 40 - 2: 00 중 식

오후 사회: 성기서(서원대)
2: 00 - 2: 50
초청발표 전재성(한국빠알리성전협회 회장)
"초기불교의 연기사상"

2: 50 - 3: 00 휴 식

3: 00 - 3: 50
발표 박영의(충남대)
"소울 벨로우의 허공에 뜬 사나이: 자아와 소외의 문제에 대한 불교적 노장사상적 연구"

3: 50 - 4: 00 휴 식

4: 00 - 4: 50
특강 오국근(동국대)
"불전(佛典)에 나타난 Eroticism"

4: 50 - 5: 00 휴 식

5: 00 - 5: 30 오후 발표 토론
좌장: 심상욱(전주대) 토론: 이환태(목원대), 서혜숙(건국대), 박경일(경희대)

6: 00 - 8: 00 리 셉 션 (경희대학교 주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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