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ENU

방명록

제목

이대로 사라지기엔 아까운 혁신적 철학도의 자기소개서

작성자
소오강호
작성일
2014.09.04
첨부파일0
조회수
1508
내용

이 email에는 곧 서울대학교에 보낼 자기소개서 초안을 첨부했습니다.

[자기소개서 내용 : 간략한 본인 철학탐구 이력(해인삼매 체험 및 들뢰즈 공부), 명상철학의 의미(철학의 치유-각성적 역할 재조명), 현대 존재론의 한 축이 될 통합과학으로서의 기학 정립, 세계무대에서 동북아 불교의 재조명(거꾸론 선 화엄) 등] 

 

저는 얼마 전 학생부종합전형(입학사정관제)에 응시하기 위한 필요조건인 추천서를 구하기 위해 이하와 같은 글을 돌린 적이 있습니다. 

================================================ 

한 송이 꽃에 우주가 담긴 원리를 현대 철학으로 풀어내기.

(아트만, 일심, 세계신을 전제하지 않고 법계연기를 전개하기. 거꾸로 선 화엄.)

현대철학, 심층종교, 치유심리학의 융합.

객관적 사실과 인지 과학에 기반을 둔 명상 철학 정립.

획일화된 파시즘적 대입제도에 반기를 드는 개혁.

(사회는 유동적-창발적-미시적 모자이크가 되었으나 대입제도는 여전히 고루한-고정적-주입식-거시적 스테인드글라스)

"새로운 철학 장르를 개척하고 부패한 대입 제도를 혁신하고자 합니다."

 

축약본 : http://blog.naver.com/wholesavior/220045186883

전문 : http://blog.naver.com/wholesavior/220017194943

=======================================================

 

위 url의 요지는 본인의 사상을 소개하고 대학 입시를 위한 추천서를 구하는 이유를 밝힌 것입니다.

대입제도에 대한 요지만 다시 한번 함축하여 말하면 이하와 같습니다.

다음은 대학입시에 대한 글이니 이에 관심 없으신 분은 읽지 마시고 '철학 사상'을 담은 '자기소개서' 부분만 읽어주셔도 좋습니다. 

(철학 사상은 첨부한 파일 및 하단의 '자기소개서'에서 소개. ===~===로 구획을 표시했습니다.)

=========================================================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현행 대입제도는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2.본인의 사상을 소개하기 3.대입용 추천서를 구하거나 실력에 합당한 환경을 제공 받아 연구에 활력을 부여받기 위함


 - 추천서를 요청하는 이유1(왜 대학에 가려는가?) : 대학에 가려는 이유 : 심도 있는 철학 공부를 위해서는 환경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작가에게 작품환경이 중요하듯) 또한 서양철학의 경우 주해서가 전무하여 독학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 추천서를 요청하는 이유2(명문대 철학과 입학에 걸맞은 철학력이 있는가?) : 저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파시즘적 입시제도의 파괴적 문제를 철학적으로 고찰한 후, '획일화된 교양인'의 포획장치에서 벗어나 자기주도적-열정적-창의적 학습의 내공을 10년간 꾸준히 쌓아온 결과,(이처럼 대입제도의 문제를 고찰하고 이를 새로운 시도로 개혁하려는 시도는 철학자로서의 '양심'이기도 합니다.) 명문대학에 합격하고도 남을 정도의 실력과 비전을 창출해냈고, 이를 입증할 수 있습니다.

자신감의 근거는 첫째-확고한 실력과 비전, 둘째-파시즘적 대입제도를 옹호하는 모든 종류의 주장을 수집 후(즉, 제 주장에 대한 모든 종류의 반론을) 하나씩 논파하는 작업을 마쳤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는 중세 종교에서 파문을 당했으나, 그들의 주장을 하나씩 논파하여 자신감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 확고한 비전-열정-실력이란 무슨 의미인가? 옥석을 가려내는 것이 명문대학 입시 제도의 역할입니다. 인류사에 대학이 생긴이래 현재까지 있어온 동서고금의 무수한 철학과 지원생들을 모두 모아 놓고 가장 뛰어난 비전-열정-실력-잠재력을 지닌 철학도를 뽑는다고 가정한다면, 저는 손쉽게 우승컵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제가 세계 최고의 철학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대학원에 입학해도 괜찮을 수준의 학생이 대학 입시용 철학 리그에 참가할 경우 어렵지 않게 우승컵을 거머쥘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저의 철학 사상은 앞으로 소개할 '자기소개서'에 비교적 자세히 적었지만(자기소개서 양식상 엄청난 제한이 있긴했으나) 간략히 논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21c 동북아 氣-道-禪學은 이현령비현령 수준의 기틀과 사이비종교들의 남용으로 위상이 바닥에 떨어져버린 상황입니다. 저는 이러한 동북아 철학을 현대철학적 관점에서(multiplicity, 거꾸로 선 화엄) 재조명하여 '세계철학의 미래를 선도할 새로운 담론장', ' 현대 존재론을 이끄는 철학'으로 재정립시키고자 하며,(철학의 치유-각성적 성격의 조명을 중심으로) 이 비전을 서술한 '자기소개서'를 작성했습니다.(https://www.dropbox.com/s/dwvwq8b3zwj86d0/%EC%9E%90%EA%B8%B0%EC%86%8C%EA%B0%9C%EC%84%9C.hwp?dl=0) (이 자기소개서는 명문대 철학과 입학 자격이 충분하다는 입증 자료일 뿐이지, 이 자기소개서를 가지고 노벨상을 받겠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이미 노벨상을 받을 수준이라면 철학과에 입학해서 배울 것도 없을 것입니다.)

둘 째 : 감히 스피노자를 언급한 이유는 현대 대입제도의 부당함이 중세 종교의 탄압을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중세는 경제-사회 구조가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수준이라 지식인층도 그정도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경제-문화가 이미 창의형 구조인데 유독 대입제도만 전근대-근대 수준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경제시대를 이끄는 유명CEO들도 신랄하게 한국 교육제도를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 대부분의 기관은 인재 등용에 '실력'을 최우선으로 보며, 이것은 두말할 필요 없는 합리적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대입제도는 응시자가 지원한 전공 과목에 대한 실력-비전-열정-잠재력이 아무리 뛰어나도(세계1위 수준이라도) '추천서'가 없으면 응시불가하고 자신의 전공이 아닌 다른 과목까지 쓸데없이 암기해야 합니다.(대입에 성공하는 즉시 쓸모 없어지는 죽은 지식들까지) 이는 마치 '프로그래머'를 꿈꾸며 우수한 코딩 능력을(웹제작) 기르고 웹사이트 제작에 대한 참신한 아이디어까지 갖춘 인재에게 '요리 실력'을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추천서를 요청하는 이유3(왜 수능에 응하지 않는가?) : "너는 뭘 좋아하니? 필로스있어? 난 사랑한다고 그랬다. 그 과목을 공부하니, 점수가 좋으니를 물어본게 아니고 사랑하는게 있냐라고 물은거야. 뭘 사랑해? 사랑 못해! 전교1등하는 아이는! 공부를 해야 되니까! 다 외워야 되니까! A라는 친구가 좋으면 그 친구랑만 있을려고 그러겠지. 이 음악이 좋으면 그것만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 다른걸 듣니? 1등하는 아이는 평범해져 나중에.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는 있지만. 좋은데 취업할 수는 있지만. 역사에 이름이 남는 그 어떤 사람은 생기지 않거든." -강신주 (http://www.youtube.com/watch?v=5xc34yZBtHY)

요 즘은 수능 전형보다 "입학사정관제-학생부종합전형"이 지배적입니다. 이 제도는 겉으로는 창의적 제도처럼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전과목을 다 잘해야 하는 내신 위주의 평가제도입니다. 여전히 제도 전반을 지배하는 것은 반(反,anti) 창의입니다.(입학사정관제의 파시즘과 수능의 파시즘은 중복되는 문제이니, 입학사정관제만 대표로 비판하겠습니다.)

학제적 공부, 융합적 창조를 하는 사람은 다과목을 열심히 암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양한 학문의 융합은 능동적 태도라는 전제 조건에서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학제적 성격의 공부를 강요하고 주장하기 전에(다과목 강요는 융합 창조성을 오히려 억제하는 방향), 능동적인 태도를 길러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우선입니다. 능동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 열려있는 사고를 하는 사람, 자신의 삶-열정-학문이 하나 되어 몰입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틀을 깨는 독창적인 '통섭과 융합'이 창발적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 사람은 다방면에 대한 호기심과 주도적 탐구심으로 똘똘 뭉쳐있기 때문에 강압적인 다과목 암기를 하는 사람보다 결국에는 훨씬 더 박학다식해집니다. 그러나 이런 주도적 학습자는 강압적인 다과목 암기가 요구하는 무차별적 테스트에 맞지 않습니다. 학제적 공부를 한다고 해서 대학에 존재하는 모든 과목을 공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파이형 인재는 자기가 원하는 소수의 과목을 깊게 팝니다. 그래서 다과목에 통달할 때도 깊이 있는 수준에서 융합적으로 통달하는데, 이 시간은 조금씩 맛보고 버리는 사람에 비해선 당연히 오래걸립니다. 이런 이유로 테스트에 걸맞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한우물을 파다 보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결국엔 깊으면서도 넓은 수심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랬을 때 자기 것이 되고 실다운 것이 됩니다. 한번에 모두를 파려들면 모든 우물을 한 삽 뜨다 만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굳이 이런 거창한 논의까지 할 필요도 없이, 철학과 지원생은 철학만 잘해도 대학수학능력에 아무 문제 없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논지대로 철학에 참된 열정이 있는 사람이 철학을 깊게 파다보면 자연히 다른 학문도 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특히 저처럼 현대철학,통합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므로 미리 부터 다과목에 대한 교양을 강제할 명분은 없습니다. 이는 개인의 자연스런 학습욕구[puissance]를 억압하는 것이고, 천재에게 평범하고 균등한 수준의 교양인이 되라고 강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학자들은 물론이요, 이건희 회장같은 경영인들도 이 문제를 오래전부터 강력히 비판해오고 있습니다. 현대 경제는 '교양인'이 아닌 '괴짜'가 이끌고 있습니다.

사 랑하는 과목이 있으면서도 전 과목을 암기해서 명문대에 가는 사람은 위선과 자기파괴를 저지르는 것입니다.(즉, 이런 제도는 파괴적이고 불합리합니다. 불합리한 제도에 순응하지 않고 새로운 방식을 생성해내는 것이 깨어있는 철학도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학제적 공부를 한 사람은 남이 요구하는 문제 보다는 자신이 생산하는 문제 해결에 적합합니다. 어느 대학에서는 자신이 문제를 내고 자신이 풀게 만든다고 합니다. 창조적 인재는 이러한 대학수준의 문제 풀이에 능합니다.(재현이 아닌 생성에)

그러나 입학사정관제 전형에 일부 창의적 요소가(자율서술형 자기소개서) 있다는 것은 긍정적입니다. 이 틈이 창의전형의 희망이기에 여기에 응하려 합니다.

- 추천서를 요청하는 이유4(고등학생 때 왜 학생부종합전형에 응하지 않았는가?) : 제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에는 약소하게나마 창의성이 담긴 전형인 입학사정관제 조차도 없었습니다. 완벽히 획일화 된 철혈 공산 입시 제도만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미 나이가 들었을 때, '문제 푸는 기계'에 질려버린 대학 교수들의 압력으로 ‘입학사정관제’라는 창의 전형의 씨앗이 움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잔혹하게도 이 제도는 현역고교생 위주의 제도라는 처참한 부조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서울대학교를 제외한 모든 대학은 검정고시를 보거나 고교 졸업 후 3년이 지난 사람은 입학사정관제 응시가 불가합니다. 단 한 곳의 희망인 서울대학교는 비고교생까지 추천서를 구해야 한다는 파시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학업이 아니라 추천서를 구하는데 온 정력을 쏟아야 하는 제도는 비합리적이라고 생각)

입 학사정관제에 응하려면 ‘추천서’가 필수인데, ‘추천서 제도’의 기원은 차별입니다. 미국 정부가 유대인이 명문대에 합격하는 비율을 떨어뜨리기 위해 고안한 것이 추천서 제도입니다.(현재의 미국 입시제도에서는 가장 중요하지 않은 마지막 고려사항) 이것이 한국에 수입되자 또다시 비열한 차별적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고교생이 아닌 경우 추천서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지만 고교생은 추천서를 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담임교사가 알아서 잘 작성해줍니다. 추천서를 옵션으로 구비하는 제도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으나 현행 제도는 추천서가 없으면 다른 것은 살피지도 않고 응시불가입니다. 이는 고교생이 아닌 사람의 응시를 곤란하게 만드는 제도이며, 고교생이라 해도 추천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추천서를 엉망으로 제출할 담임교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추천서를 ‘잘’ 써주지 않을 교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과반수의 교사들은 학생에게 대리 추천서를 요구한다고 합니다.(학원 등에서 대필해준 추천서를 담임 교사에게 제출하면 이를 교사의 이름만 얹혀서 제출하는 관례) 명목상 추천서는 ‘학생을 오래 지켜본 사람의 조언을 듣고자 함’이겠으나, 실질적으로는 ‘현역 고교생이 아닌 사람을 입학사정관제에 응시하기 힘들게 만들기 위한 거름망’, '대필 추천서를 구하기 위한 사교육비 확산'이라는 난센스만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현역 고교생이 아닌 사람의 접근을 가로막는 대입제도는 ‘20세 전후의 학생들이 대기업 취직을 위한 하나의 자격증으로 대학 간판을 선택하게 만들고 이것에 응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대입 기회를 박탈해버리는 직선적인 근대 사회’의 표상입니다. 그토록 평생교육과 다원화 교육을 부르짖지만, 정작 입시 제도는 지극히 근대적인 형식을 띠며 시대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 하고 있습니다. 자기표현 욕구가 강한 주도적-자발적-창의적 학생은 내면의 열정을 거세하고 순종적인 노예가 되어야 좋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학의 순기능을 생각한다면 어느 시대든 ‘참된 학자적 자질’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는 것이 대학의 의무입니다. 그렇다면 대학은 고교생만을 선호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런 부조리함에도 제가 입학사정관제 전형을 고수하는 이유는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선택할 수 있는 대입 전형은 추천서-입학사정관제 전형과 수능 전형 두가지 뿐인데, 내면의 열정이 있는 사람에게 수능 전형은 인생에 종말을 고하는 것입니다. 지금 일제강점기로 돌아가서 강제 징용이 시작된다고 한다면, 많은 이들은 그것이 인생을 허비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누군가는 반역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리고 반역하는 사람은 주류 세력으로부터 탄압을 받을 것입니다. 제가 주장하는 ‘맞춤형 대입 제도’는 공장식 학업 제도에 반발하는 독립 운동이며 머지않은 미래에는 누구나 이 뜻에 공감할 것입니다. 교육계의 세계적인 석학들도 이미 이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이에 대한 자세한 근거는 全文 참조) 100년 후에는 누구나 제가 하는 말을 공감할 것이나, 지금도 누군가는 제 말을 이해해 주리라 기대하며 글을 올립니다.  

============================================================================================================================================

 

<자 기 소 개 서>

 

제가 서울대학교를 지원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으나(종교학과와 들뢰즈 연구자의 존재 등), 언급한 바대로 다른 대학은 현역 고교생이 아닌 경우 학생부종합(입학사정관) 전형의 응시자격 자체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서울대 입학처의 어느 입학사정관님께 문의해보니 서울대학은 현역 고교생이 아니라도(검정고시생이나 3년전고교졸업생이라도) 학생부종합전형으로 지원할 수 있으며, 합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군요. 이 틈(탈주선)은 실로 어두운 감옥과 같은 대입제도에 비친 한줄기 빛과 같습니다. 

 

 

 

 

 [가독성을 위해선 이하의 글 보다는 첨부한 HWP파일을 보시길 권합니다.]

HWP : https://www.dropbox.com/s/dwvwq8b3zwj86d0/%EC%9E%90%EA%B8%B0%EC%86%8C%EA%B0%9C%EC%84%9C.hwp?dl=0

자 기 소 개 서

 

 

 

1. 고등학교 재학기간 중 학업에 기울인 노력과 학습 경험에 대해, 배우고 느낀 점을 중심으로 기술해 주시기 바랍니다. (1,000자 이내)

저의 철학 탐구 동인은 말 없는 우주 근본 원리에 대한 호기심, 유한한 삶에 대한 회의, 창조적 삶에 대한 갈망입니다. 이것이 목숨 보다 우선하기에 포획장치에서 탈주하여 유목민의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파시즘적 공교육 하에서는 내면의 의문을 조금도 해소할 수 없음을 깨닫고 17세 때 학교를 자퇴한 후 동양철학-()의 탐구를 시작했습니다.)

강렬한 탐구심 덕에 에 입문한 지 한 달 만에 모든 개체 안에 우주가 담겨 있음’(만인-되기), ‘모든 생각과 행동이 있음과 없음을 동시 구족한 상태를 체험했고 훗날 법성게를 통해 이것이 해인삼매임을 확인했습니다.

 

그 후의 공부는 선과 삶 사이의 관계였으며, 잡스의 사례를 필두로 사업--인문학의 관계를 고찰하다 인문 중심적 융합 창조의 삶이란 세상의 가치를 탐구하는 것에 달렸음을 간파하고 이런 관점으로 인문학 전반을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을 거쳐 인문학계의 거두 들뢰즈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철학에서 초기 불교 무아 사상과 동북아 불교 진아 사상 간의 대립을 철학적 전개로 해소할 수 있으리라는 실마리를 발견하였으며(거꾸로 선 화엄), 이는 동북아 불교를 재조명하고 본인의 철학을 정립하는데 중요한 요소이기에 들뢰즈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그동안 저는 서양 철학을 감광판 안에 세상을 박제화 시키려는 몸부림 정도로 여겼었습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재현-전제-헐거운 철학사를 쇄신하고 근본(잠재-)-생성-실제의 철학, 이성과 명상의 기묘한 혼합을 보여주었습니다. 세상이 차이 발생적으로 존재한다는 앎은 인식의 창을 틔워주었고(이는 철학 치유-각성의 단초) 개념 창조로서의 철학이야말로 제가 평생을 찾아 헤맨 근본적으로 창조적인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개체와 전체>라는 곡을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곡은 -철학-심리학-과학의 합주곡이며, ‘명상 철학이라는 장르를 선도할 것입니다. 이 곡을 통해 사이비 단체들에 점령당한 국내 명상계와 이에 동조하는 학계의 잠을 깨우고 싶습니다.

 

2. 고등학교 재학기간 중 본인이 의미를 두고 노력했던 교내 활동을 배우고 느낀점을 중심으로 3개 이내로 기술해 주시기 바랍니다. , 교외 활동 중 학교장의 허락을 받고 참여한 활동은 포함됩니다. (1,500자 이내)

[서울대에서 현대프랑스철학 수강]

자신의 대학수학능력이 어느 정도인가, 대학 교육이 정말 필요한 것인가를 가장 확실히 아는 방법은 직접 대학 강의를 들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학 강좌를 살펴보니 마침 저의 관심사인 들뢰즈 존재론에 대한 강의를(데란다 해설) 발견했습니다.

 

요즘 대학은 청강이 안 된다는 말도 있고, 대학 교육을 받은 적도 없으면서 3학년생을 기준으로 한 수업을 무턱 듣는다는 것은 무모할 수도 있습니다. 이 긴장과 용기의 혼재 속에 대학을 찾아갔고, 감사하게도 청강을 수락 받아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여름의 절정에 왕복 4시간이 걸리는 지하철~언덕길을 거쳐야 강의실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강의실에 도착하면 현기증적 더위를 능가하는 학구열을 지닌 학생들을 볼 수 있었고, 이는 나태함을 막아주는 경종이 되어주었습니다. 또한 가슴이 탁 트이는 방목형 건축과 산의 조화, 관심사가 비슷한 교수와 학생이 모여 이룬 학습의 시너지는 더위를 잊게 해주는 쾌적함이었습니다. 작가에게 작품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듯 학자에게도 공부환경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느꼈고, 이 단비 같은 기회를 놓칠 수 없어 하루도 빠짐없이 수강했습니다.

 

지각을 한 경우는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었습니다. 이는 연쇄적인 몰이해를 낳는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한 번의 지각도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각인했습니다. 다행히 온라인 데란다 강의를 발견하여 이 도움을 통해 전반적 강의 내용을 소화했습니다.(위상기하학과 개체군 생태학의 강도적 성격을 중심으로)

 

데란다로 읽는 들뢰즈 강의에서 받은 영감은 과학에 패배하여 천대받는 여왕이 된 철학을 다시 존재론을 이끄는 통솔자로 되돌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통합과학으로서의 기학’, ‘현대 존재론을 이끄는 철학을 꿈꿔왔습니다. 이는 현대학문의 성과를 특정 개념에 귀속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학문의 성과를 배치하여 '인문적 가치'생성하는 것이고, 사이비 과학과의 차이는 과학을 단지 재료로 여기기에 객관성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만난 들뢰즈]

천개의 고원 번역자 김재인 선생님께서 들뢰즈 사상의 개요를 소개한다는 특보를 보고 흥미롭게 참여했습니다. 매 강의는 쉴 틈 없이 두 시간 반 동안 강도 높게 진행되었고, 질문을 던지려면 없는 틈을 비집어야 했습니다. 철학 전공자가 아니면서도 이런 수업에 돈을 지불하고 참여하는 독특한 분들을 만난 것이 신선했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강의 내용은 옛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 '분자-되기'입니다. 저는 10년 전 유수행이라는 소설에서 도덕경의 매력을 느끼며 철학에 입문했습니다.(도덕경 텍스트를 놓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던 시절)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도가적 수행의 결실을 맺은 무사가 나비와 하나 되는 경지의 검무(劍舞)를 펼치는 장면입니다. 검무를 펼치기 전 주인공은 마음속으로 묻습니다. ‘장주(莊周)인 자기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나비인 자기가 꿈속에서 장주가 된 것일까?’ 장주와 무사는 나비, 장주, 무사라는 몰(mole)을 허물고(탈기관체) ‘생성’(物化)의 영역에(내재성의 평면) 접어든 것입니다.

 

[심경에서 명상]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으로 최훈동 원장님께서 진행한 명상 프로그램에 참석했습니다. 힌두교 이론과 종교의식은 실망스러웠고, 행동과 마음작용의 기저에 무의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성과였습니다. 무의식을 공부해보니 학파마다 천차만별의 이론이 있음을 발견했으며 정신분석, D&G, 명상심리학의 관점을 폭넓게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8년간 철학 블로그 운영]

철학, 명상, 종교 중심의 학술자료 및 본인의 사상을 게재하는 개인 블로그를 8년째 꾸준히 운영 중이며(학술 포스팅 약1500, 누적방문자55만명), 근래엔 국내 최대 규모의 철학 커뮤니티 철학의 세계 운영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3. 학교 생활 중 배려, 나눔, 협력, 갈등 관리 등을 실천한 사례를 들고, 그 과정을 통해 배우고 느낀 점을 기술해 주시기 바랍니다. (1,000자 이내)

(현재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지 않기에, 통합적 이해를 위해 여러 학자에게 발제한 과정에서 일어난 경험을 소개하겠습니다.)

 

초기 불교의 인식론을 인지과학으로 재조명하여 동국대 학위 논문에 게재된 상온에 대한 인지과학적 연구는 학문적 도약을 일으킨 연구로 보여 큰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습니다.

 

논문을 읽다 보니 식온에 대한 정의가 일반적 정의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 문제를 다양한 불교철학 커뮤니티와 불교철학자들께 발제했습니다.(철학 공부를 하다 보면 하나의 이론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접할 때가 많으며, 통합적 이해를 위해선 민감한 사안이라도 과감한 문제제기를 해야 합니다. 저는 폐쇄적 환경에 처해있기에 이를 위해 더한 각고의 노력을 쏟고 있습니다.)

 

이번 사례는 동국대 교수진과 초기불교 스님들이 하나의 의견 집단을 이루고, 명문대 교수진이 반대 의견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게시물수정

게시물 수정을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댓글삭제게시물삭제

게시물 삭제를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